솔숲 사이로 피어나는 송이향에 파묻힌 하루
흐린 대기를 뚫고 열차가 달린다. 누런 들판엔 추수하는 농부들의 손놀림이 바쁘고, 이미 수확이 끝난 빈 들판 위로는 하얀 백로 두 마리의 날갯짓이 한가롭다. 스치는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솔내음이 풍겨오는 것만 같다.
이 무궁화호 열차는 00백화점에서 고객을 위해 마련한 전국 특산물 여행을 위한 임시열차다. 행선지는 ‘솔숲 사이로 송이향이 부는 곳’이라는 경북 봉화. 공기 좋고 물 맑은 무공해 청정지역 봉화에서 직접 ‘버섯의 왕’이라는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것이다. 산림욕과 송이요리는 덤이고.
“오랜만에 예쁜 송이풀도 보고 맛있는 송이향도 맡을 수 있겠네요.”
A씨는 이미 송이를 잘 알고 있었다.
“여행을 좋아하고 특히 산을 좋아해 매주 등산을 다녔어요. 깊은 오지산행 때 가끔 송이버섯을 발견한 적이 있거든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갓 서른이 된 젊은 주부가 어찌 금보다 비싼 송이를 맛보았을까.
B씨는 “단 한 번도 송이 맛을 본 적이 없다”라고 했다.
B씨의 18개월 된 아들은 열차 안을 자신의 ‘영토’로 여기는지 맨발로 뒤뚱거리며 이곳저곳 기웃거렸다. 전 객차를 통틀어 가장 나이가 어린 덕에 여행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귤이나 과자 같은 ‘전리품’을 챙길 때마다 예의 바르게 머리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전리품을 반드시 이웃에게 나눠주는 미덕도 잊지 않았다. 인심 좋은 아기 덕에 8호 객차는 곧 가족적인 분위기가 되었다.
양평, 원주 지나 제천쯤에 이르렀을 때 레크리에이션 진행자가 들어와서는 여행 분위기를 고조시키고는 퀴즈를 냈다.
“백인 엄마와 흑인 아빠 사이에서 갓 태어난 아이는 어떤 색깔의 이를 갖고 있을까요?”
‘부족 국가’ 버전의 퀴즈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여기저기서 “흰색이요!” 하며 진행자가 예상한(?) 오답들이 들려왔다. 그러나, 얼마 뒤 누군가 말했다.
“갓난아이는 이가 없습니다.”
그제야 퀴즈의 함정을 알아챈 아주머니들이 여기저기서 웃음보를 터트렸다. 8호차의 여객들이 대부분 50줄을 넘긴 구세대들이라 진행자의 의도가 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객실 통로를 기준으로 ‘평화’ 팀과 ‘사랑’ 팀으로 나눠서 진행된 풍선 빨리 전달하기 게임은 열차 안을 거의 가을운동회 분위기로 끌고 갔다.
처음엔 서먹서먹하던 객실의 사람들이 게임이 끝난 뒤엔 모두 오래된 사이처럼 친근해졌다. 시댁 가족과 함께 온 젊은 며느리의 ‘가을편지’ 낭독이 끝난 얼마 뒤 열차는 서서히 멈춰 섰다. 오늘의 목적지 봉화였다.
양질의 송이가 많이 나는 봉화 땅
경상북도 땅 최북단에 있는 봉화는 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을, 동쪽으로는 낙동정맥을 끼고 있어 나라 안에서 오지 중의 오지로 손꼽혀 온 고을이다. 그만큼 숲이 짙고, 특히 토양이 산성이라 예로부터 이웃의 울진과 더불어 소나무가 잘 자라는 땅으로 알려져 왔다. 거기서 나는 송이니 질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화동들이 건네주는 꽃다발도 받고, 주민들로 꾸려진 농악대 공연도 구경하며 식당으로 이동하는 차에 올라탔다.
점심 메뉴는 송이전골. 한 달쯤 전에는 1kg당 70만 원까지 호가했다는 그 비싼 송이로 전골을? ‘북한 김정일 위원장의 특별 선물’인 송이가 남쪽에 건네 졌을 때 평범한 국민들은 그저 ‘송이 맛은 어떨까’ 하며 입맛만 다셨을 것이다. 그 송이를 전골요리로 맛보는 것이다. 식탁에 앉기도 전에 입에 침이 고여왔다.
연구결과 동맥경화, 심장병 등 성인병에 특효가 있고, 특히 특유한 향기에는 항암 작용을 하는 성분이 있다는 송이. 식당 주인은 “날송이를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요리로는 이 송이전골이 가장 일반적이고, 맛도 좋다”며 자랑을 멈추지 않았다. 일행은 갑자기 나라 제일의 미식가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송이전골로 입맛을 몇 단계 격상시킨 뒤, 식당 앞에 샘솟는 탄산수인 다덕 약수로 입가심까지 한 일행은 설레는 가슴으로 버스에 올랐다. 연보라 송이풀 무더기로 피어난 소나무 숲에서 송이가 솟아난 진귀한 광경을 관찰하고, 직접 채취도 해볼 수 있는 ‘송이채취 체험행사’는 이번 봉화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아니던가.
잔대 꽃, 쑥부쟁이 같은 보랏빛 가을 야생화가 하늘거리는 숲길.
“아가야, 이건 고들빼기 꽃이고, 저건 물봉선이란다.”
B씨는 아들에게 눈에 띄는 들꽃 이름을 하나하나 들려주었다. 등에 업힌 동예는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심각하게 듣다가도 금방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송이보다 이 가을 내음이 훨씬 좋은가 보았다.
어느새 송이가 많이 난다는 어느 산에 도착했다. 주인의 안내로 10명씩 조를 지어 소나무 빽빽한 산을 올랐다. 송이가 나는 소나무 종류는 육송, 금강송(춘양목) 등 여러 종이 있는데 그중 금강송 뿌리에서 나는 송이가 향이 가장 짙고 조직이 단단하다고 한다. 봉화는 전국에서 춘양목이 가장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기 때문에 봉화 송이는 외국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송이가 나는 곳은 부자지간에도 비밀로 한다는데 이렇게 공개해도 괜찮은 건가?” 하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열심히 주인의 뒤를 따랐다. 얼마 뒤, 솔잎에 숨어있는 튼실한 송이를 발견할 때마다 여자들은 “어머머”, 남자들은 “이런” 하며 탄성을 질렀다.
‘웬만한 사람은 밟고서도 모른다’는 은밀함과 신비로움의 대명사 송이를 직접 보고 손수 채취한 사람들은 의기양양하게 산을 내려왔다. 도시로 돌아가 두고두고 자랑할 만한 멋진 경험이었을 것이다.
막 따낸 싱싱한 송이의 쫄깃쫄깃 씹히는 질감과 혀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 온몸으로 스며드는 알싸한 송이향은 아무리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도 금세 사로잡는다. 어떤 이는 일본 사람들이 송이를 유별나게 좋아하는 이유를 ‘방사능 피폭자에게 치료 효과가 있어서’라고 하지만, 아마 송이의 독특한 향기 때문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일행은 추수 끝난 들녘에 가서 시골의 낭만을 즐긴다. 갖가지 시련을 다 견뎌내고 무사히 수확을 끝낸 가을의 빈 들판은 ‘없음’이면서도 넉넉하다. 그래서 ‘발이 시리도록’ 거닐고 싶어 지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역설의 교훈을 깨우쳐주는 공간 한가운데 서서 선선한 가을바람에 온몸을 맡겼다. 코끝에 가을 냄새가 걸려들었다.
송이향이 진동하는 차로 이동한 ‘특산물 장터’엔 스님들이 전통적인 재래 방법으로 담근 고추장이며 된장도 나왔고, 30만 원 호가하는 장뇌삼도 있었고, 봉화 전통주도 팔았다. 그래도 역시 오늘의 주인공인 송이의 인기가 최고였다.
먹거리 장터 한쪽에서 금방 찐 떡을 공짜로 나눠주자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찐 감자와 송이 꼬치 등을 요리해주는 천막 앞엔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송이요리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주민들이 해주는 음식이기 때문인지 입안에 쩍쩍 달라붙었다. 특히 돼지고기를 곁들인 송이 꼬치는 초특급 별미였다.
송이향을 싣고 떠나는 열차
가을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산으로 첩첩 둘러싸인 오지 고을 봉화의 저녁은 일찍 찾아오고 있었다. 이제 ‘송이와 함께 춤을’ 즐겼던 봉화에서의 아쉬운 하루도 접을 시간이 된 것이다. 타고 온 열차가 청량리로 가기 위해 출발 준비를 하는 도중 ‘송이 고을의 원님’인 군수가 객차를 돌면서 “아름다운 봉화를 다시 한번 찾아주시길 바란다”는 인사를 했다.
해 저무는 흐린 가을 저녁, 기차가 봉화역을 떠났다. 우리는 송이 두 송이를 놓고 둘러앉았다. 낮에 사 온 봉화의 전통주 선주(仙酒)를 한 모금 들이키고 송이를 물어뜯으니 입안에 송이향이 가득 번졌다. 아기는 봉화에 올 때처럼 역시 맨발로 객차 안을 휘젓고 있었다. 송이를 한 입 떼어 문 채로…. 이 무궁화호는 송이향을 싣고 가는 열차였다. <2000년 가을 열차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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